▲ 유창목

독일에는 만들어진 ‘중세도시’라는 별명이 붙은 인구 2만 명의 작은 도시 로텐부르크가 있다.(2011년 1만 명) 독일을 여행할 경우 베를린이나 뮌헨, 푸랑크푸르트같은 대도시를 떠올리겠지만, 그런 대도시 위주로만 여행을 한다면 독일을 제대로 보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독일은 철저하게 지방 분권화된 국가이고, 전통과 정체성을 간직한 수많은 소도시가 서로 어울려 잘 발전해온 나라이기 때문이다. 독일을 대표하는 관광코스로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로만티크 가도’(Romantische Strasse)에는 인구 30만을 넘는 도시가 하나도 없는 소도시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로텐부르크는 ‘로만티크 가도’를 찾는 여행객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관광 명소로, 로맨틱한 길이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낭만적이고, 동화 같은 도시라는 독일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는 작은 도시이다. 교통의 요충지도 아니고, 간이역에서 지방열차로 갈아타야만 갈 수 있는 곳에 위치한 인구수 2만 명의 작은 도시가 어떻게 연간 100만이 넘는 국내외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을까?

로텐부르크는 처음부터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었다. 19세기 초에 낭만주의에 매료된 소수의 관광객이 빛이 바랜 고풍스러운 모습에서 향수를 달래기도 했지만 프랑켄 지역에 위치한 이 도시는 19세기 중반까지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로텐부르크가 유럽을 여행하는 관광객들의 시선을 끌게 된 데에는 1881년 처음 열린 이후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역사 축제 ‘마이스터트룽크(Meistertrunk)'가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종교 갈등으로 30년 전쟁이 한창이던 1631년, 로텐부르크는 틸리 장군이 이끄는 가톨릭 군에 점령되었을 당시, 시장 게오르크 누슈의 활약으로 수많은 학살과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는 일화를 소재로 만들어진 역사 축제극, 마이스터트룽크는 초연부터 언론들이 대서특필하면서 기대이상으로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전문 배우가 아닌 평범한 시민들이 연출하는 아마추어 축제극을 보기위해 많은 관광객이 로텐부르크를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마이스터트룽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계기는 축제극에 출연하는 시민들의 전통 의상과, 무대배경으로 활용되어 자연스럽게 ’중세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애향심과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낡고 오래된 구시가지의 건물과 성벽이었다.

로텐부르크의 고풍스러운 풍경은 19세기 초에 타지 사람들에 의해 새롭게 재발견되고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중세의 보석’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지만 로텐부르크에는 정작 16세기 종교개혁 이전에 건립된 건물은 드물고,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미 공군의 폭격으로 구시가지 절반이 파괴되어 전쟁 후에 상당부분 건립되었다. 건물의 상당수가 중세의 실질적인 유산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로텐부르크는 ‘중세도시’로서 명성과 로만티크 가도라는 매력에 별 손상을 입히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로텐부르크 시민들은 지역의 전통과 정체성을 간직하는 역할에 충실해왔고 옛것에 대한 순수한 역사의 가치관을 간직했기에 가능했다.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로텐부르크를 이야기할 때 『서부전선 이상 없다』의 작가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보다 적절히 표현한 사람은 없다. 나치에 의해 국적을 박탈당하고 떠돌던 레마르크는 전쟁이 끝나고 자신의 고향인 북부 독일의 오스나브뤼크를 찾아가지만 어린 시절을 보냈던 거리는 사라졌기에 길을 헤매며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쟁전의 거리 모습이 담긴 그림엽서를 사는 것뿐이었다. 여행을 계속한 그는 로텐부르크에 도착해서 평온함을 느끼게 된다.

레마르크는 후미진 골목길과 성벽, 낡은 돌계단이 남아있는 이 도시야말로 “희망과 안식의 보루이자 혼란스러운 영혼을 위한 제2의 고향”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고향이란 지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감성적인 개념임을 깨달았다네.” 레마르크에게는 다른 모든 것이 다 변한다 하더라도 원래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서 정서적으로 늘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진정한 고향이었다.

원주시민들이 아카데미 극장을 지키려고 애를 썼던 것은 건축미가 뛰어나거나 민족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간직한 건물이라서가 아니다. 뛰어난 예술적 가치를 품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가공된 ‘중세도시’를 간직한 로텐부르크 시민들처럼 ‘변치 않는 고향’에 대한 감성적인 정취가 시민들의 가슴에 뜨겁게 각인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방인들로부터 아카데미 극장이 무참히 짓밟히고 난 지금, 나는 내가 태어난 고향에서 ‘중세의 로만티크’를 찾아 헤매는 떠돌이 이방인이 되어 아카데미 극장을 지키려고 했던 시민들의 공황장애를 걱정해야 한다.

인구 2만의 로텐부르크가 독일을 대표하는 도시가 된 데는 자신들이 간직한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구 시가지의 오래된 건축물에 대한 몸에 밴 가치와 통념이 반영되었기에 가능했다. 복잡해진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변화로 초래되는 충격을 완화하고 고향에 대한 정서와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건축물을 재건하기 보다는 목가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이상적인 ‘로만티크’를 재발견 하면서 전통 문화도시의 반열에 오늘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법정문화도시 반열에 올랐던 원주, 그 땅에 60년 동안 존재했던 아카데미 극장을 통해 원주시민들은 ‘중세의 로만티크’를 즐기던 로텐부르크 시민들처럼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끼려고 했다. 문화의 문맹자들에 의해 무참히 허물어진 아카데미 극장은 ‘근대의 보석’이라는 가치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기에 원주시민들 가슴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